동해교회에서 주님을 섬기는 김완회 형제입니다. 제가 구원받은 후,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교회인 동해모임을 개척하게 된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해 성령님의 지혜를 빌어 간증하게 되었습니다. 이 간증을 통하여 여러 성도님이 주님의 은혜를 받기 원하고 또한, 주님께 영광이 되었으면 합니다.
제가 동해로 부르심을 받은 지 어언 만 18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유수와 같은 세월입니다. 제가 아내와 백일이 갓 지난 큰딸 소망이와 함께 동해로 개척을 나왔었는데 어느덧 소망이가 올해 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첫째, 아무 것도 아닌 자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기까지
제 고향은 경기도 화성입니다. 불교 가정에서 태어나 불교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는데 당시 고향에는 안동 김씨들이 주축이 되어 섬기던 아주 큰 절이 있습니다. 경기도 화성시 동탄면 중리에 있는 만의사라는 절입니다. 저의 어머님께서 일주일이 멀다 하고 그 절을 다니셨기에 저희 형제는 어려서부터 절을 놀이터 삼아 지내곤 하였습니다. 또한, 어머니께서는 거의 새벽마다 목욕재계를 하시고 자식 잘되기를 정성 드리시던 그야말로 전형적인 한국의 미신과 불교에 심취하셨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셔서 제가 남사중학교(이전에는 M 선교사가 책임자였던 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성경 말씀을 대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선교사님과 사역하시는 형제님을 통하여 전파되는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또한, 교과과정에 성경공부 시간이 있어 듣기 싫어도 들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그 당시 교목 겸 성경과목 선생님은 임정빈 선생님이셨습니다.
매주 목요일 저녁, 학교에서 집회가 있었는데 동네 친구인 김형제님과 함께 참석을 하면서 복음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구원을 받지 못했고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는가?’하는 내용을 이론적으로만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항상‘언젠가는 이 교회에 다시 나가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고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정작 청년이 되어서 발을 들여놓은 교회는 장로교회였습니다. 청년회에도 참석했는데 같은 동네 청년 다섯 명이 함께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인 김00형제가 저에게 다가와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완회야, 네가 지금 교회에 열심히 나가는 건 잘 아는데 네가 죽으면 정말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니?”처음 이 질문을 받고는 너무나 화가 나서 그 친구에게 폭언을 하며 다투었습니다. “내가 지금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그게 무슨 말이냐? 교만한 거 아니냐?”라고 반문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자리에 누워 친구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정말 내가 죽으면 천국에 갈 수 있을까?” 그런데 제가 얻은 결론은 ‘갈 수 없다.’였습니다. 저는 구원받은 적이 없었고 천국에 갈 수 있는 그 어떤 근거도 없었습니다. 그 후로 저는 기독교에 회의와 반감을 갖게 되었고 교회생활도 중단했습니다. 그러던 중 어떤 지인이 “휴거”라는 책을 소개해 주었고 그날로 그 책을 전부 다 읽었습니다. 너무나 놀랍고 두려운 내용이었습니다. 그 책을 읽고 저는 크게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날이 마침 수요일이어서 제 스스로 외암교회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외암교회 노 모친님들께서 한결같이 “구원받았느냐?”라는 질문을 하셔서 처음에는 부끄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런 예의 없는 분들이 있나?’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저를 긍휼히 여기시어 1981년 11월 23일 오후 4시경, 로마서 1장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라는 말씀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로
제가 구원받은 후에 밤마다 어머님의 꿈에 조상님이 나타나 “네 둘째아들 때문에 내가 배고프다.”라며 어머님을 어렵게 했습니다. 나중에는 혼이 나갈 정도로 어머님께서 조상님(사단)때문에 어려움을 겪으셨습니다. 어머님은 끊임없이 저를 설득하시며 교회에 다니지 말라고 많은 핍박을 하였습니다. 사단은 저의 신앙을 포기하게 하려고 가정에 여러 가지 우환거리를 만들었고 이를 통하여 저를 시험에 들게 했지만 힘들게 구원을 받은 만큼 교회문제(신앙문제)는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이후에 장로교회에 다니던 동네 청년들이 모두 외암모임으로 연결되어 주님을 섬기는 역사를 보게 되었고 제 동생과 형님, 이종사촌들과 많은 학생, 청년이 연결되었습니다. 또한, 인근 마을의 청년이라면 한 번쯤은 외암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선배건 후배건 시간이 있으면 찾아가서 복음을 증거했던 일을 새롭게 추억해 봅니다. 인근의 학생들도 많이 연결되어 복음을 듣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물론 제가 학생회를 인도할 때의 일입니다.
그 후에 주님께서 안양에 직장을 허락하셔서 만도기계 연구개발부에 입사하여 안양모임에서 주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언제나 제 마음의 소원은 주와 복음을 위해 사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부르시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교회를 이루어 섬기는 일이 소원이었기에 부르심을 기다리며 준비하였습니다. 청년 시절에는 경인지역 청년 형제자매님과 함께 매주 월요청년모임에서 말씀도 배우고, 노방전도와 전철전도를 했던 추억들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그때 함께 주님 안에서 꿈을 키워오며 오직 주와 복음을 위한 비전을 품었던 청년 형제님 가운데 저와 여러 형제님이 현재 전심사역자로 주님을 섬기고 계시고 몇몇 자매님은 사역자의 아내로서 역할을(서울, 경기, 대전, 제천, 동해 등) 감당하고 계십니다.
언젠가 사랑하는 청년 형제님(현재 서울 S모임에서 사역하고 계심)과 함께 추운 겨울에 강원도 정선으로 전도여행을 1주일간 다녀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그곳은 정말 낙후된 오지마을이었습니다. 한 골짜기 동네를 전도하려면 하루가 다 가 버릴 정도의 오지마을이 많은 곳이었는데 함께 동역했던 사랑하는 형제님과 함께 추위와 배고픔에 지쳐 마을을 내려오면서 부른 찬송가가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이었습니다. 이 찬송가와 순례자의 노래를 부르면서 죽어가는 영혼들을 향한 선교의 열정과 주님을 향한 비전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내려왔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또한, 정선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승객들에게 전도지를 돌리며 전도하였던 기억과 정선에서 청량리로 돌아오는 기차에서도 전도지를 나누어 주며 육성으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때는 저와 사랑하는 형제님의 마음에 성령님의 충만한 용광로가 뜨겁게 타오르는 듯 뜨거운 전도여행이었습니다.
셋째, 서원 기도와 동해시로 주님이 부르심
주님께서는 부족한 저에게 오산모임에서 주님을 섬기던 최명희 자매를 평생의 반려자요 동역자로 만나게 하셨습니다. 아내 또한, 자신의 생애를 주와 복음을 위해 바치기를 소원하며 기도하던 자매였습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우리는 1988년 9월에 결혼을 하였습니다.
1989년도 7월에 아내가 첫 아기를 출산하여 오산 친정집에 가서 몸조리하고 있었고 용인에 계시던 제 어머님이 저의 식사문제로 안양에 올라오셨습니다. 마침 안양모임에서 전도집회가 있었는데 첫날은 불타는 지옥이라는 영화를 상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하나님! 만약에 제 어머님이 이번 전도집회 때 구원을 받으시면 올해 안에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는 사역지로 개척을 나가 복음을 증거하겠습니다”라고 “서원기도”를 하였는데 놀랍게도 어머님이 구원을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뿐이고 그“서원기도”에 순종해야 하는 일로 말미암은 두려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와 아내는 사역을 위해 기도하며 준비해왔기에 담대함으로 하나님께 순전한 마음으로 선교지역을 인도해 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 당시 동해시의 영적 상황에 대해 잠시 말씀드리자면, 강원도 강릉모임에서 동해시에 하나님의 교회가 개척되기를 기도하며 동해시에서 가정집회를 하고 있었고 전국에 공문을 보낸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동해시는 한 번도 가보거나 기도해 본 적이 없는 바닷가 마을이기에 아무 상관이 없는 지역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8월에 서울 G모임과 안양모임 등 몇몇 모임이 강원도 속초의 어느 초등학교를 빌려 수양회를 하였는데 그때 안양모임의 장로님이셨던 정형제님과 강릉모임에서 사역하시는 김형제님과의 교제 가운데 동해시를 소개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들이 전부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렸고 성령님께서 저를 동해로 이끌어 가셨습니다. 동해로 가는 것을 하나님 뜻으로 확신하고 “하나님이 저를 동해로 보내시려면 분명한 말씀을 주십시오!”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에스겔 33장1-6절과 이사야 43장 2절 말씀을 주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고하여 이르라 가령 내가 칼을 한 땅에 임하게 한다 하자 그 땅 백성이 자기 중에 하나를 택하여 파수꾼을 삼은 그 사람이 칼이 그 땅에 임함을 보고 나팔을 불어 백성에게 경고하되 나팔 소리를 듣고도 경비를 하지 아니하므로 그 임하는 칼에 제함을 당하면 그 피가 자기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그가 경비를 하였던들 자기 생명을 보전하였을 것이나 나팔 소리를 듣고도 경비를 하지 아니하였으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그러나 파수꾼이 칼이 임함을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여 백성에게 경고치 아니하므로 그 중에 한 사람이 그 임하는 칼에 제함을 당하면 그는 자기 죄악 중에서 제한바 되려니와 그 죄를 내가 파수꾼의 손에서 찾으리라”(겔33:1-6)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43:2)
마침 동해가 고향인 형제님들이 계셨는데 동두천에서 사역하셨던 최형제님과 호주에 선교사로 나가 계시던 이형제님이십니다. 그분들도 동해시에 하나님의 교회가 개척되는 것을 오랫동안 기도를 해 오셨기에 그분들을 만나 “제가 동해로 가라는 하나님의 인도 하심을 받았는데 가도 되겠습니까?”라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한 분이라도 반대를 하면 동해시 개척을 포기하려고 했는데 그분들 모두 기꺼이 기쁨으로 기도하겠노라고 격려를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해(1989년도) 8월 말에 풍전동예배당 헌당식 겸 강원도 사역자(장로)모임이 있었습니다. 저는 안양교회 정 장로님과 함께 방문하여 동해시에 개척하기를 기도하고 있음과 그동안의 하나님께서 인도하심을 간증하였을 때 형제님들이 기꺼이 영접해 주셨습니다.
넷째, 동해에서의 사역시작
직장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백 일된 아기를 처가에 맡기고 저와 아내는 예배당을 얻고자 강릉교회 사역자 김형제님의 도움을 받으며 여러 차례 방문하였습니다. 강릉모임 성도님들과 김형제님의 사랑과 보살핌이 없었다면 동해모임 개척에 어려움이 많았을 것입니다. 이 지면을 빌어 강릉모임 성도님들과 김형제님께 주님의 이름으로 진심 어린 감사를 드립니다.
그 당시 동해는 발전이 더디고 낙후된 어촌 소도시라 얻을만한 마땅한 홀이 없었습니다. 사실 홀을 얻을만한 돈도 없어 기도 끝에 아파트를 전세로 임대하여 가정집과 예배당으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안양모임에서 천거를 받고 큰딸의 백일잔치를 치른 후에 동해시로 이사를 왔습니다. 1989년11월12일에 서울 경기지역의 형제자매님들이 방문하여 함께 첫 만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당시에 저희 부부가 젊었을 때라 구도자도 젊은 분들이 계속 연결되어 여러 명이 구원받고 침례를 받았습니다. 개척 초기 몇 년 동안은 집집마다 전도지를 돌리며 복음을 전했던 그야말로 열정적인 시기였다고 생각됩니다. 또한, 인근의 어린이가 30명이 넘게 연결되어 아파트에서 어린이를 위한 복음집회를 서울 B모임의 G 형제님을 강사로 모시고 하기도 했습니다.
개척 후, 2년 뒤에 주님의 도우심으로 동해시 중심가 천곡동의 건물 지하 50평을 임대해 예배당으로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처음 개척 나와서 복음을 들었던 아파트 주변의 아이들이 새 예배당과 거리가 멀어져(차가 없어 운송수단이 없었음) 교회에 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곳에서도 영혼들이 계속 구원받고 지속적으로 침례식을 행했습니다.
그러던 중 예배당 수도 배관이 터져 예배당에 밤새 물이 넘치는 일이 있었고 이 일로 말미암아 마음고생을 많이 하였습니다. 기도 끝에 묵호동 게구석이라는 달동네에 허름한 집을 사서 보수와 개조를 해 예배당으로 모이게 되었습니다. 예배당을 가려면 80여 계단을 올라가야만 했지만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아주 좋은 장소였습니다. 이곳에서도 여러 명이 구원받고 침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동해시는 소도시에다 마땅한 직장이 없어서 구원받아 모임이 부흥하다가도 성도님들이 계속 타지로 이사하여 떠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동해시에 700mm의 폭우가 쏟아져 묵호동 게구석 예배당 인근 앞뒤 집들이 무너지고 언덕의 축대가 엄청난 폭우로 무너져 동해시에서 철거하기로 해 보상을 받고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동해시 천곡동(중심가)의 건물 3층 45평 홀을 전세로 임대하였습니다. 묵호동 게구석의 집(예배당)을 천오백만 원에 샀었는데 삼천만 원을 보상받아 시내에 예배당을 얻었습니다. 동해모임 성도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재정 문제를 하나님께서 자연을 이용하셔서 더 넓고 깨끗한 예배당을 얻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오묘하셔서 우리가 측량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 경험하였습니다.
천곡동 예배당에서 수년간 모이다가 건물주인의 비인격적인 행동(전세 기한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일방적으로 비워달라며 횡포를 부림)으로 인한 어려움이 있었으나 하나님의 능력 주심과 성도들의 하나 됨을 통하여 170평의 부지를 사게 되었고 그 부지의 기존 건물을 고치고 개축하여 예배당을 조립식으로 지었습니다.
예배당을 짓는 데 도와주신 제천모임의 이형제님께 이 지면을 빌어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사천진리 모임의 김형제님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그 외에도 여러 지역모임 형제님께서 지원해 주셨는데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예배당을 짓고 1년 후에 태풍 루사가 동해 인근 영동지역을 강타했을 때, 약 800mm의 폭우가 쏟아지면서 예배당에 물이 들고 마당(90평)의 잔디는 전부 쓸려나가고 뻘이 가득 찼습니다. 예배당 집기가 많이 파손되었고 사택에서 살던 성도가정의 신혼살림이 거의 못쓰게 되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참으로 어려운 시험이었으나 성도님들의 일치단결로 극복해 나갔습니다. 또한, 해군이 수십 명 동원되어 예배당 마당의 뻘을 치우고 정리해서 다른 곳보다 쉽게(물론 여러 날 걸렸지만)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 지면을 통하여 그동안 우리에게 행하신 수많은 하나님의 인도를 십분의 일도 말씀드릴 수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어려움 가운데 더 큰 것을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이 당시에는 힘들고 어려웠지만 돌이켜 보면 더욱 좋은 것, 큰 것을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태풍 루사 때문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기도해 주시고 물질로 도와주셨던 전국의 많은 지역모임과 성도님께 다시 한 번 주님의 이름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모든 주의 일꾼이 그러하듯 저희도 구도자가 있는 곳이면 몇 시간이 걸려도 달려가서 복음을 전한 일들이 생각납니다. 한 번은 서울에서 전화가 왔는데 울진에 구도자가 있으니 한 번 찾아가서 복음을 전했으면 한다는 부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울진은 버스로 3시간 이상 걸리고 그 구도자의 집은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불용계곡을 지나야 하는 시골마을인데 아내와 함께 가서 복음을 전했던 기억이 납니다.
태백으로 구도자를 만나러 갔던 일과 고한사북으로 구도자를 찾아 전도 갔던 일이 좋은 추억으로 남습니다. 또한, 버스를 내려 걸어서 20분을 들어가는 시골 바닷가마을인 증산마을에서 오랫동안 가정 집회를 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오직 주와 복음을 위해서 열정과 충성을 다했던 개척 초기 십 년간의 좋은 선교 추억들입니다. 현재의 동해모임 상황은 성도들이 이사를 떠나는 일이 계속 있다 보니 적은 수의 성도님이 모여서 주님께 예배드리며 섬기고 있습니다. 지난 십 년간은 영혼들이 지속적으로 연결 되었는데 요즘은 그렇지 못한 상황입니다.
저희 동해모임에서는 주일 2부 집회 때 전도훈련을 하고 문서전도도 하며 많은 결실이 맺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동해모임이 신약교회의 복음과 진리의 터 위에 더욱 굳게 세워져 나가기를 계속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저희 가정이 성령님의 능력으로 맡겨주신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다하며 저희 큰딸이 경제적인 어려움 가운데서도 대학교를 무사히 졸업하여 주님 보시기에 귀하고 아름다운 자매로 성장해 주님의 도구로 쓰일 수 있기를 기도해주십시오.
김완회, 최명희, 김소망, 김주은(일출의 도시 동해시 동해교회 )
東 昇 日 出 照 子 心
동 승 일 출 조 자 심
海 闊 天 廣 育 新 人
해 활 천 광 육 신 인
敎 育 世 人 蒙 主 恩
교 육 세 인 몽 주 은
會 集 海 岸 迎 眞 神
회 집 해 안 영 진 신
동쪽에서는 해가 뜨고 하나님께서는 아들의 마음을 비춰주시니
광활한 바다와 넓은 하늘이 새로운 사람임을 가르쳐 주네
세상 사람들이 복음의 가르침을 받아 주님의 은혜를 깨달으니
바닷가 사람들이 모여들어 복음과 진리의 말씀을 영접하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