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지 않는 배우자를 거느린 경우(고전7:12-16) -Christians Married to Non-Christians
물론 믿는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해서는 안되고(고후6:14-16), 오직 결혼은 “주 안에서만”(39절) 하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고린도 성도들 가운데는 결혼한 후에 주님을 믿게 되어 믿지 않는 배우자를 거느리게 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경우, 믿지 않는 배우자와 계속 살아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배우자를 버려야 하는 것인지, 그것이 갈등이 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사도 바울의 권면은 매우 단순하고 놀랍다.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며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12절,13절)
이 권면이 놀라운 것은 에스라/느헤미야 시대에는 이방 여인을 취한 이스라엘 사람은 그 이방인 배우자와 그 사이에서 출생한 자녀까지 다 버리라고 했는데(스9:1-2,11; 10:2,3; 느13:23-31) 사도 바울은 “버리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인즉,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14절)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 “거룩하게 되고”라고 한 말씀은 율법 아래서 믿는 자가 믿지 아니하는 자로 인해 부정해지던 것에 비추어 한 말씀으로서 은혜 아래서는 믿지 아니하는 배우자가 믿는 배우자로 인해 거룩하게 된다는 뜻이다.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믿지 아니하는 자가 믿는 배우자로 인해 구원을 받았다는 말씀이 아니고 거룩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는 말씀이다. 이에 베드로 사도도 가르치기를 믿는 아내가 믿지 아니하는 남편 앞에서 아내의 본분과 도리를 다하여 그 남편으로 하여금 그 아내의 성결하고 온유한 행동을 보고 믿어 구원을 받게 하라고 권면한 것을 보게 된다(벧전 3:1,2).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는 말씀은 앞에 말한 부부의 관계가 불법적이고 부정한 것이라면 그 자녀도 역시 사생아 정도로 불법적이고 부정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이 말씀 역시 믿지 아니하는 배우자가 믿는 배우자의 거룩한 행실을 통해 좋은 영향을 받게 되는 것처럼 그 자녀도 그렇다는 것이다.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 받을 것이 없느니라” 이 말씀의 뜻은 믿지 아니하는 배우자가 믿는 배우자의 잘못된 행실, 예컨대, 남편이 주님을 믿지 않는다고 무시하거나 불순종하여 남편이 갈라서기를 원하는 그런 경우를 가리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믿지 아니하는 배우자가 믿는 배우자의 믿는 것이 싫어서 도저히 같이 살 수 없어 갈라지기를 고집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라는 것이다. 즉 별거를 허락하라는 것이다. 여기 ‘갈라진다'는 것은 이혼을 의미하지 않고 별거를 의미하는 것 같다(10절,11절 참조). 그러기에 재혼에 대한 말씀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고 한 말씀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는 말씀에 이어서 덧붙인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화평 중에서 부르셨으니 할 수만 있다면 별거하지 말고 같이 살라'고 하는 신중한 권면의 말씀으로 들린다. 이유인즉 “아내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16절)
여기서 믿는 사람이 유의할 것이 있다. 즉 별거는 믿지 아니하는 배우자 쪽에서 요구하는 경우를 가리킨 것이지 믿는 배우자가 믿지 아니하는 배우자에게 별거를 요구하는 것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즉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 받을 것이 없느니라”고 하는 것이다. 이로 볼 때 믿는 배우자는 믿지 아니하는 배우자의 구원을 위해서라도 베드로전서 3:1-7의 말씀을 유의함이 합당한 줄로 믿게 된다.
다른 한편, 믿지 아니하는 배우자가 믿음의 이유로 갈라서기를 원하여 갈라설 경우 재혼해도 괜찮은 것인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에 대해서는 아마도 고린도전서 7:11절의 말씀, 곧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는 말씀을 참고함이 좋을 듯 싶다. 그러나 믿지 아니하는 배우자가 별거 중에 다른 사람과 결혼을 했을 경우에 그것은 성경적으로 합법적인 파혼이 되기 때문에(마5:32; 19:9) 재혼을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리고 그것이 무리한 생각처럼 보여지지도 않는데, 주님도, 바울도 재혼을 말씀하지 않으신 것으로 보아 재혼을 언급 좇아 떠올리시기를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 같다. 이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는 이혼하는 것 -- 을 미워하노라”(말2:16)고 하신 말씀의 강도가 어떠함을 깨닫게 된다.

구원으로 신자의 사회적 신분과 지위가 바뀌지 않는다
사도 바울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은 당시 로마 제국의 계급제도와 문화와 관습으로 보아 매우 파격적이고 혁명적인 가르침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 갔을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종교와 인종과 계급(빈부귀천)과 성과 관계없이 다 동등하다고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노예)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하지만 이러한 새로운 가르침으로 인하여 많은 오해와 문제도 생겼다. 사도 바울은 그런 문제들의 일부를 고린도전서 7:17-24에서 다루고 있는데, 그 요지는 사람이 구원을 받음으로 그 영적인 신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동등해지지만 그렇다고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가 바뀌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명하는 말씀은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17절)고 한 것이다. 즉 사람이 구원을 받을 때 “할례자”였다면 그 표를 없애려 하지 말고, 또 “무할례자”였다면 할례 받으려 하지 말라는 것이다. 즉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18절)는 것이다. 이는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19절) 지킴이 중요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다시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20절)고 강조하면서 “네가 종(노예-필자 주)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21절) 즉 사람이 노예로 있을 때 구원을 받았다면 그는 그 노예의 신분에 대해서 염려를 하거나, 또는 그 노예의 신분을 벗고 자유하기 위해 투쟁을 하거나 운동을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는 노예로 있으면서도 주님의 축복을 온전히 누리며 얼마든지 주님을 잘 섬길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그 훌륭한 예가 되지 않으셨는가!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는 말씀이 난하주에는 “자유할 수 있어도 그대로 지내라”고 되어 있어 그 뜻이 아주 선명해 진다. 이는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어느 형편, 어떤 위치에 있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또 그 주위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것이 그 삶의 목적이고, 또 목표가 되기 때문이다(고전10:31-33). 즉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노예-필자 주)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노예-필자 주)”(22절)이기 때문이다. 이로 볼 때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삶에는 종과 자주자의 구별 의식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약1:9-11)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23절)
이 말씀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 주님의 피로 사신 바 되어 주님의 소유가 되었으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사는 이기주의자가 되어도 않되며,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사는 위선자나 기회주의자가 되어도 안된다. 이는 그리스도인은 그 부르심을 받은 위치에서 “주 그리스도를 섬기”(골3:24)고 있기 때문이다. 즉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골3:22-4:1)라고 함과 같다.

결론은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25절)는 것이다. 결혼한 후에 믿어 믿지 아니하는 배우자를 거느리게 된 사람도 그 상태 그대로 지내라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구원을 받으므로 그 인종, 국적, 사회적 계급, 종교, 결혼 관계, 성 등이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각각 그 처해 있는 위치에서 주님을 잘 섬길 것이다.

--나그네